
이루지 못한 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인다.
1958년 여름, 번역실에 출근한 기행은 한 통의 편지봉투를 받게 된다. 누군가가 먼저 본 듯 뜯겨있는 그 봉투 안에는 다른 내용 없이 러시아어로 쓰인 시 두편만이 담겨있다. 시를 보낸 사람은 러시아 시인 '벨라'. 작년 여른 그녀가 조선작가동맹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방문했을 때 기행은 그녀의 시를 번역한 인연으로 통역을 맡았었다. 그리고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 기행은 그녀에게 자신이 쓴 시들이 적힌 노트 한 권을 건넸었다.
그런 만남이 있은 후 기행은 북한에서는 발표할 수 없는 시를 적어 러시아에 있는 '벨라'에게 보냈던 것인데, 그동안 어떤 회신도 없다가 1년이 지나 답신이 온 것이었다. 봉투에 러시아 시 2편만이 담긴채로.
그 봉투를 먼저 뜯어본 건 누구였을까? 벨라라면 편지도 같이 보냈을 텐데 그건 누가 가져간 걸까? 벨라는 자신이 보낸 노트를 어떻게 했을까? 당의 문예 정책 아래에서 숨죽인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기행'의 삶은 벨라에게서 온 그 회신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마음 속으로 꾸준히 되뇌일 수 밖에 없었던 그말,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r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두번째 선정도서로 선정되기까지도, 이 책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 때문에 '기행'의 삶이 우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목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되뇌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격정적이지도 않고, 담담한 문체로 쭉 써내려간 것 같은 글이었지만, 소설 속 '기행'의 현실인식 속 느끼는 그 감정만은 마음 속에 확실히 이입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중반부의 의심이, 후반부의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이 느낌이 신선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백석 시인의 본명이 백기행이라는 것도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용을 찾아보다 발견했다!)
'백석' 시인은 한국 문학사에 굉장히 독특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통영과 백석은 뗄레야 뗄수가 없을 정도로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하동을 방문하면 박경리 '토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듯, 통영을 가게되면 자연스레 '백석' 시인의 그 낭만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마 그의 삶의 일부를 소설이나마 엿보게 되었다는 것이 참 영광이었던 시간.
마지막으로 책에서 기억에 남는 하나의 구절을 꼽자면, 아래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독서모임을 위해 중반까지 다소 꾹꾹 참아가며 읽었던 소설이, 뜻하지 않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버려서 마지막으로 백석의 시를 남겨본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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